라이프 | 전시소개
하나은행 소장품 기획전시
‘반복과 변주’
전시명 | | 반복과 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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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 2025.04.11 ~ 05.31 |
전시장소 | | 서울 중구 을지로 167, 하트원(H.art1) 2층 |
전시작가 | | 7명(문신, 박서보, 백남준, 윤형근, Jean Pierre Raynaud, Jesus Rafael Soto, Zhu Jinshi) |
전시작품 | | 8점 |

본 전시는 일상과 창작 속에서 반복되어 온 행위들이 어떠한 변주를 통해 새로운 의미로 확장되는지를 조명한다. 작가들의 반복은 단순한 복제나 재현을 넘어, 비물질적인 개념을 시각화하고 감각화하는 예술적 언어로 기능한다.
기술의 진보, 형식의 진화, 격동의 역사, 내면의 목소리,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 등, 각기 다른 맥락에서 시도된 반복의 변주는 예술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익숙함 속의 낯섦, 동일함 속의 차이를 마주하게 된다.

전시장 전경

<무제>, 문신(1923-1995), Bronze, 1990
문신은 일본과 한국, 그리고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살아온 떠도는 예술가였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거나 소속되지 않은 그는, 고향도 이방이고 정착지도 경계에 머문 채 자신만의 예술 여정을 이어갔다.
그 여정 속에서 문신의 정체성은 지리적, 민족적, 국가적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었고, 그의 예술 세계 역시 회화에서 조각, 실내디자인, 건축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확장을 거듭하며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해체해 나갔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물질과 정신 등 수많은 이분법적 경계를 자유롭게 횡단하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추상 조각들은 그가 프랑스에서 접한 앵포르멜과 누보 레알리즘의 영향을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시도해온 조형 실험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Ecriture No.201106〉, 박서보(1931-2023), Pencil+Acrylic Oil on canvas, 2020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해온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의 마지막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연필 묘법’의 원화이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전개된 후기 묘법 시기의 이 작품은, 이전보다 한층 다채로운 색채를 활용함으로써,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정신적 수양의 차원에까지 이르는 심화된 예술적 울림을 전한다.
‘묘법(描法)’은 프랑스어로 '쓰기'를 뜻하는 Écriture로 표기되기도 하며, 캔버스에 색을 입히고 그 위에 연필로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하는 수행적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이는 어떤 목적이나 구상 없이, 작위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순수한 노동의 시간이며, 그 자체로 비움과 채움이 교차하는 사유의 장이다. 이러한 묘법 회화는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독자적 추상 언어를 형성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모더니즘 흐름 속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마음 심(心)>, 백남준(1932-2006), Mixed media, 1992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 백남준과 하나은행의 인연은 깊은 시간의 결을 지닌다. 하나은행 을지로 본점 로비에는 백남준의 고교 동문이기도 했던 김승유 전 은행장이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직접 의뢰한 ‘Hana Robot’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총 4점의 미디어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당시 제작된 ‘마음 심(心)’ 두 점 중 하나로, 기술의 상징인 TV 모니터를 통해 가장 인간적인 단어를 구현한 백남준 특유의 미학이 응축되어 있다. 기계와 인간, 기술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의 지형을 새롭게 그려나간다.

<심해>, 윤형근(1928-2007), 마포에 유화
대표적인 단색화가 윤형근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예술의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시기를 지나며 세 차례의 투옥과 한 차례의 죽음의 문턱을 넘은 그는, 마흔다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그가 견뎌온 역사와 감정의 무게를 고요히 담아낸다. 마포나 면포 위에 억눌러 쌓인 붓질은 분노와 울분, 슬픔의 감정을 담고 있으며, 그 위에 칠해진 오묘한 검정은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blue)과 땅을 뜻하는 암갈색(umber)이 혼합된 ‘청다색’으로, 윤형근만의 존재론적 색채 언어라 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의 거장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의 만남 이후, 그는 더욱 극단적인 단순성으로 나아가며,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는 심연의 세계를 화폭에 펼쳐 보였다.

〈Pot, dore special〉, 〈Pot, rouge special〉, Jean Pierre Raynaud(1939-), Mixed media
프랑스 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개념미술 작가 Jean Pierre Raynaud는 미술대학이 아닌 원예학교를 졸업하고 정원사로 일했던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유년시절 전쟁을 겪고 아버지를 잃은 충격으로 고통과 트라우마를 작가의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화분이라는 소재로 승화해냈다.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화분을 시멘트로 가득 채우고 페인트칠하는 예술활동 자체가 작가 스스로를 치유하기도 했으며, 이것의 결과물로 또다른 오브제가 완성되었다. 역설적으로 쓸모가 없어진 형태, 매우 컬러풀한 원색의 사용, 과도하게 확대된 크기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표현된 것이다.

〈Cube with Ambiguous space〉, Jesus Rafael Soto(1923-2005), 플렉시글라스, 1995
베네수엘라 출신의 키네틱 아트와 옵아트 분야의 선구자 Jesus Rafael Soto는 움직임, 착시, 공간감을 활용하여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시각적 경험이 변화하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스크린 인쇄된 투명한 플렉시글라스를 반복적으로 교차시킨 이 작품은 착시 효과를 일으키며 관람자의 시선의 리드미컬한 경험을 이끌어낸다. 큐브 형태의 조각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람 시점과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동적인 예술을 담아냈다.

〈Baishi Temple-4〉, Zhu Jinshi(1954-), Oil on canvas, 2020
베이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중국 추상미술 및 설치미술의 선구자 주진스(Zhu Jinshi)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실험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는 추상화를 중심축으로 삼아 오리엔탈리즘, 개념미술, 토지미술 등 여러 미학적 개념들을 조화시키거나 충돌시키며, 동시대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특히 주걱과 삽을 활용해 유화 물감을 조각처럼 두텁게 쌓아 올리는 방식은, 평면을 넘어선 회화의 공간성을 제안하며 독특한 시각적 울림을 창출한다. 그가 만들어낸 이 중첩된 색채와 물성의 밀도는 새로운 회화적 미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시장 전경
글 _ 하나은행 총무부 큐레이터 최지은
게시일: 202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