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ㅣ 취미

손끝으로 마음을 다스리다
필사의 매력

더디게 왔지만, 잰 걸음으로 사라져버릴 소중한 이 계절, 필사(筆寫)와 함께 아날로그 정취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한 글자씩 글을 옮겨 적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얻어짐’의 순간이 전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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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로하랑 필사노트’(필사 서적: 환상들, 최유수 지음)

보편적 취미가 된, 필사

필사(筆寫)는 말 그대로 글을 옮겨 쓰는 행위이다. 그저 글을 베껴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필사는 생각보다 많은 효용을 담고 있다. 많은 디지털 기기들이 ‘쓰는 행위’를 대신해주고 있지만, 그럴수록 필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SNS에는 ‘필사’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한달 동안 수십 만 건에 달한다. ‘필사스타그램’ ‘필사노트’ ‘필사챌린지’ 등 관련 태그를 단 수많은 게시물들이 공유되고 있다. 올해 3월에 출간된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라는 필사 관련 도서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6개월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이제 필사는 단순히 몇몇이 누리는 소수의 취미가 아닌,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취미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필사를 누리는 연령대도 다양해졌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들에 피로감을 느낀 젊은 세대가 필사 인기에 편승하면서 즐기는 방법들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여행을 하며 필사를 일기처럼 꾸려가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또는 ‘혼밥’을 하며 필사를 즐기기도 한다.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대세 취미’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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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인스타그램 ‘로하랑 필사노트’

디지털 디톡스를 위한
필사 관련 도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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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위즈덤하우스, 유선경)
20만 부가 판매된 필사 관련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필사 열풍을 몰고 온 책.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도서 추천은 물론, 필사의 효용을 높이는 가이드까지 알차게 담겨 있어 입문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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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빅피시, 이주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필사 방법을 단계별로 담았다. 작가 최은영, 김애란부터 박완서, 박경리,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까지 대가들이 남긴 작품 100편을 엄선해 하루 한 장씩 필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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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몰입하는 시간(마음책방, 김영아)
하루 한 번 오직 나만을 위해 몰입된 시간을 가져보려 하는 이들을 위한 필사 책. 위로와 치유의 문장과 함께 하는 100일의 시간을 담았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필사를 하려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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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위즈덤하우스, 유선경)
20만 부가 판매된 필사 관련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필사 열풍을 몰고 온 책.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도서 추천은 물론, 필사의 효용을 높이는 가이드까지 알차게 담겨 있어 입문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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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빅피시, 이주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필사 방법을 단계별로 담았다. 작가 최은영, 김애란부터 박완서, 박경리,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까지 대가들이 남긴 작품 100편을 엄선해 하루 한 장씩 필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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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몰입하는 시간(마음책방, 김영아)
하루 한 번 오직 나만을 위해 몰입된 시간을 가져보려 하는 이들을 위한 필사 책. 위로와 치유의 문장과 함께 하는 100일의 시간을 담았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필사를 하려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

나만의 필체 발견은, 필사가 주는 ‘덤’

손글씨를 쓰는 일이 많지 않다 보니, 나의 필체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사를 통해 나만의 필체가 발견되고, 또 ‘업그레이드’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지역 필사동호회에서 활동 중인 박인희 씨는 “손에 힘이 없어서 오래 쓰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필사를 통해 펜 잡는 힘도 좋아지고, 글씨체도 좋아졌다.”라며 “작고 기울어진 글씨체 때문에 남들 앞에서 글씨 쓰는 게 부끄러웠는데, 필사를 통해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고 전한다. 필사를 하다 보면, 내 글씨체의 부족한 부분이 보이고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발전된 필체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처음 필사할 때는 일반적으로 볼펜으로 시작하지만, 자신의 필체나 쓰고자 하는 문구와 분위기가 어울리는 필기류를 찾아 사용해보는 것도 좋다.

대한민국 대표 ‘글씨 명인’
‘희귀’ 공무원, 필경사

필경사는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붓글씨로 작성하고, 국새의 날인을 담당하는 공무원이다. 지난 62년간 단 4명이 거쳐갔고, 올해 유기원 주무관이 5대 필경사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인들에게 낯선 직업인 필경사는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온더블럭>에 4, 5대 필경사들이 출연해 관심이 높아졌다. 2024년 5대 필경사로 임용된 유기원 씨는 영화 <노량>의 이순신 장군 필체,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조 필체 등을 담아낸 바 있다. 필경사가 매년 작성하는 임명장만 7,000여 장에 이른다. 컴퓨터를 켜면서 업무가 시작되는 동료들과는 달리, 수많은 붓들이 비치된 자리에서 먹을 갈면서 시작되는 업무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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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프로그램<유퀴즈온더블럭>에 대한민국 5대 필경사 유기원 씨가 출연해 직업 관련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사진=<유퀴즈온더블럭> 공식 유튜브 채널

쓸모 많은 필사의 매력

필사는 단순한 행위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점’을 갖고 있다. 필사는 눈으로 읽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도 하며, 직접 손을 움직여 써보는 다양한 감각을 사용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내용과 문체, 어휘, 구조를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글을 여러 번 곱씹는 과정을 통해 글의 내용과 작가의 의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표현 방식을 익히게 되고, 필력 향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모비딕>을 쓴 작가 허먼 멜빌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250번이나 필사했다. <태백산맥> 조정래 작가 역시 “필사는 정독 중에 정독”이라며 독자들에게도 필사를 권한 바 있다. <거장처럼 써라>의 저자 윌리엄 케인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등 위대한 작가들의 사례를 빗대어 필사를 ‘최고의 글쓰기 학습법’이라고 전했다. 중장년층은 물론, 청소년들에게도 많은 이들이 필사를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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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로하랑 필사노트’(필사 서적: 부처의 마음, 다이구 겐쇼 지음)

필사하며, 마음 정리하기

필사를 위해서는 눈과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잡념이 깃들면 손이 움직이지 못한다. 필사는 이런 점에서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치유’의 의미도 갖는다. 많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필사에 대해 “단순작업을 통해 자신을 괴롭혔던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한다. 약물 등에 의존하지 않고 가장 손쉽고 자연스럽게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필사할 문구나 책을 정할 때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로 고르는 작업도 필요하다.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글귀를 따라 적다 보면, 누군가가 나에게 힘을 내라고 말해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감정 정화’와 ‘감정 표출’ 효과는 필사의 대표적 순기능이기도 하다. 하루에 정해 놓은 필사 양을 채웠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과 만족감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부족한 ‘성공 경험’ 을 쌓게 한다. SNS에 ‘로하랑 필사노트’를 운영하는 로하랑 씨는 필사에 대해 “심신이 지쳐 나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신호가 왔을 때,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고 필사가 그 당시 큰 도움이 되었다”며 “필사를 하는 순간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이라고 의미를 전했다. 연말을 맞아 한 해를 정리하고, 분주한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면 필사를 통해 나에게 집중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