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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노벨문학상 그 후
최근 출판 업계가 다시없을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 한강이 불러온 나비 효과, 어디까지 퍼졌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이자 아시아 최초 여성 수상이라는 역사를 쓴 한강 작가. 단순히 상을 받은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한강’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의 상위권은 모두 한강의 작품이 독식했지만 품귀 현상이 일어나 책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다. 유발 하라리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신작도 한강 열풍에 밀려 주춤한 상황. ‘한강’이라는 브랜드 하나만으로 출판, 인쇄 업계가 모두 들떠 있다.

대형 서점에 마련된 한강 작가 특별 코너
지난 10월 10일 밤(한국 시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3일 만에 한강 작가의 작품은 50만 부 이상 판매고를 돌파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서 수상 직후부터 13일 낮 2시까지 27만 부, 교보문고에서 같은 날 정오까지 26만 부가량 팔렸다는 집계 발표에 따른 것이다. 대중들이 두 플랫폼에서만 1분당 평균 136권씩을 사간 셈이다. 주요 서점에서는 물량이 바닥나 예약판매로 전환됐고, 그 마저도 공급이 따라가기 어려워 이미 주문한 고객들에게 배송 지연 안내를 하기도 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등 그의 대표작들은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수상 후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반응이 뜨겁다. 출판사들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창비와, <디 에센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흰> 등을 출간한 문학동네는 물량 부족에 대비해 긴급 증쇄를 요청하기도 했다. 한강의 영향은 택배 업계에도 큰 작용을 했다. CJ대한통운은 10월 한 달간 배송한 도서 물량(박스 기준)이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27.3% 증가했다고 11월 3일 밝혔다. 도서 물류가 타 카테고리 대비 '합배송' 비중이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CJ대한통운을 통해 유통된 도서 권수 증가율은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작별하지 않는다〉 프랑스어판 〈IMPOSSIBLES ADIEUX〉 표지

미국 뉴욕의 주요 서점 '스트랜드'의 매대에 한강 책이 모두 팔린 모습
일본 도쿄 최대 규모의 서점 ‘기노쿠니야’ 신주쿠 본점에는 ‘축 노벨 문학상 수상 한강’이라고 적힌 홍보 문구가 내걸린 특별 판매대가 마련됐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대표작 번역본은 대부분 팔렸고, 일부 영어 번역본 위주로 남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 서점으로 알려진 미국 뉴욕 스트랜드 서점은 한강의 책들을 전시한 특별 매대를 설치하고 이를 공식 SNS에 소개하기도 했다. 한강 작가를 필두로 한 한국문학의 호재는 이제 시작이다. 출판계에서는 최근 억대 계약 소식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심여사는 킬러>는 대형 출판 그룹 펭귄랜덤하우스 산하의 노프 더블데이 출판사와 2억 원대 선인세 계약을 맺었고 이희주 작가의 장편 <성소년>은 영국 팬 맥밀런과 1억 원대로 계약을 마쳤다. 영미권 문학의 뿌리이자 미국 등 영어권 독자들과 연결될 수 있는 영국의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점은 눈 여겨 볼 대목이다.
책읽기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문학도서에 대한 수요도 늘었다. 한강 작가가 언급하거나 읽었다고 알려진 책들 역시 주목받고 있다. 노벨상 발표 직후 스웨덴 한림원이 공개한 한강 작가의 전화 인터뷰에서 언급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지난 10월 10일부터 10월 16일까지 전년 동기 대비 판매량이 35배 증가했다. 한강 작가가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에게 추천했다고 알려진 <긴 호흡>과 <올리브 키터리지>의 판매량 역시 급등했다. 2014년 '지금 나를 만든 서재' 기획을 통해 한강 작가가 공개한 '내 인생의 책 5권'도 주목받고 있다.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 파스테르나크의 <어느 시인의 죽음>,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카테리네 크라머의 <케테 콜비츠>의 총판매량도 무서운 수치로 증가했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전 진행된 인터뷰에서 최근 읽었다고 말한 국내 소설가의 신작 2권, 조해진 작가의 <빛과 멜로디>와 김애란 작가의 <이 중 하나는 거짓말> 역시 한강 효과를 누리고 있다.

한강 작가가 운영하는 독립 서점 책방오늘 전경
종로구 통의동의 독립 서점 ‘책방오늘’은 한강 작가가 운영에 참여해왔다. 2018년 양재동에 문을 열었고, 2023년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책방오늘을 통해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보기 힘든, 좋은 책을 발굴했다. 책방오늘은 문학뿐 아니라 인문·예술 책과 그램책들도 소개하며 낭독회나 독서클럽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낭독회나 작가 강연 등의 행사가 있을 때는 한강이 직접 책을 진열하고 소개하는 등 서점에 애정을 쏟아왔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후로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탓인지 10월 12일부터 당분간 휴업을 안내했다. 11월 13일 다시 문을 열면서 ‘한강 작가는 책방의 운영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고 SNS에 공지하기도 했다.

한강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걸린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
최근 연세대학교 국문과 4학년 때 쓴 한강의 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시는 1993년 한강이 등단하기 전, 1992년 ‘연세춘추’의 연세문화상에서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당시 한강의 문학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한강의 시 ‘편지’는 한강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가 눈에 띈다. 연세문화상 심사위원이었던 정현종 당시 국문과 교수와 김사인 문학평론가는 한강의 시에 대해 “한강의 작품들은 모두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굿판의 무당의 춤과 같은 휘몰이의 내적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그러한 불과 같은 열정의 덩어리는 무슨 선명한 조각과 또 달리, 앞으로 빚어질 어떤 모습들이 풍부히 들어 있는 에너지로 보인다”며 “능란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그 잠재력이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고 심사평을 남겼다.
평생 책과는 거리가 멀던 사람도 ‘한강’이라는 이름은 알게 됐다. 글로벌 문학계에서도 한국 문학의 위상이 높아졌다. 한국적 맥락을 넘어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 그의 작품은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 지금의 이 호황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인한 한시적인 인기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책이 들릴 수 있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본다.

<검은 사슴>
1993년 등단 후 꼬박 3년간 몰두해 완성한 한강의 첫 장편 소설. 치밀하고 빈틈없는 서사와 깊은 울림을 주는 시적인 문장들로 출간 당시 찬사를 받았다. 다시 세상 밖으로 돌아 나오지 못하더라도 심연 속으로 발을 내딛는 인물들의 여정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어둠이 아닌 빛을 따라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대의 차가운 손>
미술 조각 기법의 일종인 ‘라이프캐스팅(석고 등의 소재를 이용해 인체를 그대로 본뜨는 방식)’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존의 고통과 상처를 치열하게 탐구하는 소설. 미스터리한 조각가의 실종을 다루면서, 그가 남긴 섬뜩하고 비인간적인 조각 작품을 둘러싼 은밀한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인간 정신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바람아 분다, 가라>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간절하게 숨 쉬는 사람들의 이야기. 촉망받던 한 여자 화가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중심으로, 각자가 믿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새벽의 미시령 고개에서 40년이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사고, 거기에 얽힌 인물들의 내밀한 사연과 진실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