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n B”는 “Plan A”가 실패했을 때 나오는 위기대처용의 계획이 아니다. “Plan A”를 수정하고, 전진하게 도와주는 목적으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할 무기다. 단기간에 기발한 “Plan B”가 생기기는 어렵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자신만의 원칙을 세우고 검증하며 제대로 된 정보와 안목을 바탕으로 나만의 “Plan B”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Art Bank ㅣ 아트투자
[똑똑한 아트컬렉션]
우리의 “Plan B”
미술품 컬렉션이 필요한 이유

에드 루샤(Edward Ruscha)
Pay nothing until April (2003)
캔버스 위에 아크릴, 152.7 × 152.5cm
출처: tate.org.uk
에드 루샤(Ed. Ruscha)의 <4월까지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코로나 시대에 우리를 위로하는 메시지 같다. 해가 뜨고 지는 듯한 모호한 시간대의 몽환적 이미지는 현실을 잊게 해주고, 그 위를 덮는 문구가 내년 4월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에드 루샤(Ed. Ruscha)는 성경 문구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단어를 배경 전면에 배치하는 작업을 하는 미국 작가다.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작가의 말처럼 문장들 역시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를 담았다. 그의 작품들은 높은 시장가격에 거래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원 학장인 미노체 샤피크(Minouche Shafik)는 “과거의 직업이 근육과 관련이 있었다면, 요즘의 직업은 두뇌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미래의 직업은 심장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맞다. 기술, 정보 모든 것이 갖춰진 미래사회를 사는 우리에겐 심장을 뛰게 할 근원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정제된 높은 수준의 감정에 다가갈 수 있는 무언가가 말이다.
‘예술은 이 시대의 정신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이며, 예술가의 노력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찾고 시대의 징조를 읽을 수 있다.’라고 한 영국의 미술평론가 클라이브 벨(Clive Bell)의 말이 떠오른다. 예술이 우리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함께 호흡 중인 것이라는 말이다. 미술품을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심장을 뛰게 할 ‘감각의 도구’로 삼아보는 것은 그래서 합리적이다.
감각의 회복이 필요한 시대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예측 불가능 환경 속에 놓이면서, 완벽한 계획(Plan A)이 점점 의미 없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는 신체의 근육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지식의 근육보다, 예상치 못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자기만의 감성과 안목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올라퍼 엘리아슨 회고전, 2019년 테이트모던(Tate Modern)에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빛, 안개, 물 등을 이용해 전시공간 안에 자연현상을 구현하면서, 작품을 통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간접 경험하게 한다.
예술과 자본의 끝없는 줄다리기, “미술의 경제적 가치”
그림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작가의 천재성, 아름다운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에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그 그림이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잘 고른 미술품이 자산 증식의 촉매제가 되는 것은 맞다. ‘촉매제’라는 말처럼 미술품은 경제적 부를 쌓기 위한 긍정적인 에너지 역할을 한다. 종종 내 능력 밖의 일을 해낼 때 ‘귀인’의 힘이라고 믿으며, 소중한 만남에 감사할 때가 있다. 어쩌면 미술품도 인생에서 만나는 뜻밖의 행운 같은 귀한 사람일지 모른다.
미술의 경제적 가치를 부정하거나 공급과 수요, 마케팅에 따라 가격이 움직이는 현상에 부정적인 시선도 있다. 하지만 그림에 경제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시장을 견고하게 만들어주고, 작가와 작품을 지켜주는 긍정적 역할도 하니 예술과 자본은 좋든 싫든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여있다.

필립스 2020년 10월 21-22일 뉴욕경매, Lot167
A Bigger Book, Art Edition D
(2010/2016), 43.8 x 33 cm
아이패드 드로잉(에디션 250개)
추정가: $5,000 – 7,000
낙찰가: $20,160 (한화 약 2300만원)
출처:phillips.com

소더비 2020년 7월9일
홍콩경매, Lot 1118
30 SUNFLOWERS(1996), 182.9 by 182.9 cm
페인팅
별도 추정가 없음
낙찰가: 114,827,000 HKD(한화 약 172억원)
출처: sothebys.com
생존 작가 중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운 ‘데이비드 호크니’는 최근 경매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최근에는 아이패드를 이용해 드로잉을 그리는데, 10월 필립스 뉴욕 경매에서는 에디션 250개임에도 불구하고 한 점당 2300만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7월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는 해바라기 그림이 172억원에 낙찰됐다.
소통의 중요성, “미술의 사회적 가치”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회고전, 2019년 퐁피두센터에서
어린아이들이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작품 앞에 둘러앉아 선생님의 일방적인 설명이 아닌,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와 소통할 때 자신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느낀다. 그림을 공부하는 방법도 매한가지 같다. 전시장에 갈 때는 두 명 이상의 지인과 함께 가자. 조용히 그림 앞에 혼자 있고 싶은 날도 있겠지만, 전시장에서 그림에 대해 나눈 대화와 시간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그러니 그림 얘기를 나누는 친구를 한두 명 사귀고,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실물 그림을 보러 전시장에 가보자.
이런 활동이 미래가 불확실한 코로나 시대에 무슨 소용이며, 미술도 미래엔 사라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한 미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자. 미술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감정표현 본능이자,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이 만드는 산물이다. 그리고 모두의 일상에 위안과 기쁨을 주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교육의 목적이든, 종교적 목적이든, 사회적 활동이든 자신을 성장시키고 빠르게 목적지로 가게 해주는 보물임이 확실하다.
최근 증가한 젊은 컬렉터들은 단순히 투자 목적으로만 작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미술품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또래 집단과 소통하기 위한 매개체이다. 미술은 이들 사업에 영감을 주는 것은 물론, 기존 브랜드에 미술 옷을 입혀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있다. 반대로 작가도 음악·패션·디자인 등의 영역으로 경계 없이 활동하며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상하이
울트라바이올렛 디너에서
폴 페레(Paul Pairet) 쉐프가 이끄는 상하이에 있는 ‘울트라바이올렛(Ultraviolet)’은 음식뿐만 아니라 메뉴에 따라 영상을 사용해 공간 연출, 퍼포먼스, 빛과 향, 기온을 달리하여 식사 이상의 예술체험을 선사한다. 그래서 상하이 아트페어를 방문하는 미술애호가들이 인당 약 100만원의 식사 가격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레스토랑이 되었다.

(좌) 2019년 스털링 루비의 패션쇼
출처: vogue.com
(우) 스털링 루비 ACTS/WS ROLLIN(2011)
2020년 ICA Boston(Institute of Contemporary)전시에서
출처: icaboston.org
LA의 빈민가 벽면을 재해석한 스프레이 연작으로 유명한 작가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는 작년에 패션 디자이너로 정식 데뷔했다. 디올(Dior)과 캘빈클라인(Calvin Klein) 디자인에도 협업한 적이 있는 스털링 루비는 순수미술과 패션의 장르를 넘나드는 중이다. 순수미술작가의 패션 디자인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이제 소비자 역시 패션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의 근본적 존재 이유, “미적 가치를 보는 안목 키우기”

한스 아르퉁(Hans Hartung) 회고전이 열린 2019년 파리 시립미술관에서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알아보는 눈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작품을 소장하지 못했다고 해도 안목을 갖고 있다면, 경제적 여유가 생기는 시기에 얼마든지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할 수 있다. 지금 그림을 살 경제적 여유가 안 된다고 생각해서 컬렉터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지금은 안목을 키우는 노력을 하면 된다. 실제로 자본이 있지만 어떤 작품을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안목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다면,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말하고 싶다. 단어의 뜻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관(觀)’은 물 가운데 고요히 먹잇감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살펴보다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황새관(雚)에 볼견(見)자로 짜여있다. 그만큼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찰(察)’은 제사를 지낼 때처럼 깨끗한 손으로 경건한 마음과 자세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관찰’은 미술 컬렉션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미적 안목을 기르는 비법은 ‘보이는 것에 조용히, 그리고 주의 깊게 집중’하는 데 있다.
지금 시대, 미술품 컬렉션이 필요한 이유
미술품을 컬렉션하는 이유는 미술이 가진 ‘경제적 가치, 사회적 가치, 미적 가치’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요즘에는 ‘감각의 회복’을 위해 미술이 더 필요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는 예술 감수성이 비즈니스에 점차 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예술에 영원한 상업적 가치는 없다. 특정 작품에 대한 수요는 늘 변하고, 길지 않은 기간에도 작품가격은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미적 가치는 영원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언급한 미술품 컬렉션을 하는 이유 간의 균형을 잘 맞춘다면, 미술품은 인생사 희로애락을 함께해 주며 삶의 질을 높이는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컬렉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누군가와 작품 얘기를 나눌 순 있지만, 자기의 취향과 안목을 만들어가는 것은 혼자만의 여정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안목을 높이는 시간을 투자해보자. 이렇게 만든 감각의 근육은 속도는 더디지만, 미래를 위한 “Plan B”로 삶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 분명할 것이다.
글 이슬기 큐레이터
소더비(Sotheby’s Art Institute of Art, London)에서 아트비즈니스(MA)를 공부하고, 선화예술문화재단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였다. 2009년~2018년까지 문체부산하 (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해외미술시장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였고,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미술시장부문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