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 아르떼 추천 전시④]
상실의 감정,
예술로 고향을 되살리다
2025.09.09
전시정보
전시명 | |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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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2025.11.9(일) |
장소 |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

변관식, 〈무창춘색(武昌春色)〉, 1955, 종이에 먹, 색, 181×357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20세기 초 나라를 잃은 상실의 역사에서 독립에 대한 염원과 함께 민족을 지탱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향수(鄕愁)입니다. 나고 자란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에게 고향은 잃어버린 시간, 되찾을 수 없는 안식처, 그리고 예술로 되살려야 할 기억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는 애향(愛鄕)으로, 분단을 겪은 후엔 실향(失鄕)으로, 도시화를 거치면 망향(望鄕)으로, 질곡의 역사를 마주할 때마다 조금씩 이름을 달리했지만 향토를 그리는 마음은 지난 세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공동체의 정서였습니다.
여기 근대 한국화를 대표하는 화가 청전 이상범이 1937년 그린 ‘귀로’가 있습니다. 10첩 연폭의 커다란 산수화엔 꼬부라진 외길을 따라 소를 끌고 산골 초가집으로 돌아가는 촌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스산하고 적막해 보입니다. 비슷한 시기 시인 정지용이 쓴 시 <고향> 한 수를 얹으면 그림의 분위기가 와닿습니다.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광복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고단했는지, 생경한 고향 산골을 바라보던 예술가들은 어떤 감정이 차올랐을지가 느껴집니다.

오지호, 〈동복산촌〉, 1928, 캔버스에 유화 물감, 721×904cm, 리움미술관
1930년대 고향 땅을 떠올리는 이상범의 그림과 정지용의 시는 서울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걸렸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마련한 ‘향수, 고향을 그리다’ 특별전에서입니다. 일제강점기 35년과 광복 후 80년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이 마음속에 간직해온 ‘고향’의 의미를 근현대 풍경화와 시로 짚어보는 자리입니다. 오지호, 윤중식,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 미술가 75명의 풍경화 210여점을 소개합니다. 항일투쟁의 역사를 조명하는 다른 광복 80주년 전시와 달리 이 땅과 사람을 연결하는 향수의 정서를 되새긴다는 점에서 눈길이 갑니다.
전시는 향토 애향 실향 망향 등 4부로 구성됐습니다. 전반부는 근대미술과 문학에서 고향이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겪는 과정이 어떻게 표현됐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중 1부는 고향을 문명에 물들지 않은 평화롭고 순수한 전원의 개념으로 봤던 ‘향토색 회화’, 반대로 우리 땅을 민족 정서를 고취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한국적인 색깔을 발견하려고 애썼던 화가들의 작품들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윤중식, 〈봄〉, 1975, 캔버스에 유화 물감, 41×53cm, 국립현대미술관
인상적인 작가는 오지호입니다. “회화는 인류가 태양에게 보내는 찬가”라고 표현했던 오지호는 빛과 색이 만들어내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인상주의가 한국 풍토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양식이라 믿었습니다. 풍경을 재현을 위한 취재 대상으로만 여겼던 당대 화가들과 달리 그는 새로운 조형의 대상으로 바라봤습니다. 고향인 전남 화순군의 동복천 흐르는 마을을 그린 ‘동복산촌’(1928)에서 이런 미학이 잘 드러납니다. 1930년대 ‘조선 양화계 거벽’으로 불렸던 천재 서양화가 이인성의 작품도 여럿 걸렸습니다. 고향이 대구 향토 특산물인 사과가 자라는 사과나무를 단독 초상화처럼 화면 가득 채워 구도를 잡은 ‘사과나무’(1942), 향토명산을 소묘풍의 빠른 붓질로 다룬 ‘팔공산’(1930년대) 등이 눈길을 끕니다.
2부는 광복 이후 화가들이 수십 년간 잃었던 한국 전통의식을 풍경화로 되찾으려 했던 실험이 돋보입니다. 2부 역시 1부처럼 이상범의 회화 ‘효천귀로’로 시작합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되는 날 그린 것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새벽안개 자욱한 들판 언덕을 넘어 소를 끌고 돌아가는 광경을 그렸습니다. 1부의 ‘귀로’와 달리 새벽기운 속 여명이 움트는 듯한 기운생동이 희미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광복 전후 우리 산천을 바라보는 작가의 달라진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영국, 〈산〉, 1984, 캔버스에 유화 물감, 975×130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근대 수묵화 혁신을 이룬 이응노, 고향 제주와 통영에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발견한 변시지와 전혁림 등의 작품과 함께 한국적 모더니즘의 출발점인 김환기와 유영국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남 기좌도(현 안좌도) 출신인 김환기는 평생 고향 섬에 대한 그림움을 안고 활동했습니다. 고향의 바다와 구름, 산, 달, 별 등이 우주적 확장을 추구했던 김환기식 조형언어의 원천이었음을 ‘섬 스케치’와 뉴역 시절 그린 ‘새벽별’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광복의 기쁨을 얼마 누리지도 못한 채 맞닥뜨린 분단의 현실은 당대 화가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겼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분단의 철조망이 끊어버린 고향으로 가는 길은 비극적 영감을 줬습니다. 이응노가 동양화가로는 드물게 동족상잔의 비극과 도시의 참상을 다룬 ‘폐허의 서울’(1950), 뛰어난 균형감각이 빚은 가지런한 정물화로 유명한 도상봉이 폐허가 된 명동성당 일대에서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을 그린 ‘폐허’(1953)는 풍경화가 시대의 기록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전혁림, 〈통영풍경〉, 1992, 캔버스에 유화 물감, 130×160cm, 통영시청
분단으로 인한 실향의 정서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는 1970년대 들어선 망향의 감정으로 바뀝니다. 어떤 이에게 고향은 갈 수 없는 북녘땅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어린시절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라진 땅이 됐습니다. 화가들은 닿을 수 없는 고향을 새로운 이상향의 세계로 그렸습니다. 정미소집 아들이었던 윤중식은 ‘섬’(1953) 등의 작품에서 어린 시절 자주 봤던 비둘기와 석양을 그리며 고향을 되새겼습니다. 김종휘의 ‘향리’ 시리즈는 때때로 가슴이 저밉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 산이 형태를 잃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 이상 기억에서도 사라진 고향이지만, 사무치게 그립다는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진행됩니다.

김종휘, 〈향리(鄕里)〉, 1987, 캔버스에 유화 물감, 97×1945cm, 국립현대미술관
글. 유승목 기자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 본 콘텐츠는 한경매거진앤북에서 제공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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